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토급 전함 (문단 편집) == 함장들 == [[https://ja.wikipedia.org/wiki/%E5%A4%A7%E5%92%8C_(%E6%88%A6%E8%89%A6)|일본어위키 야마토]]에 야마토 함장 6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아래 내용은 일본어 위키를 참조했다. 아래에 서술되었듯이, 영문위키에 실린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야마토에 부임한 함장은 6명이다. 1대 함장은 [[https://ja.wikipedia.org/wiki/%E5%AE%AE%E9%87%8C%E7%A7%80%E5%BE%B3|미야자토 슈토쿠(宮里秀徳)]]이다. 1941년 12월 16일에 야마토가 취역하기 전에 자리를 옮겼지만,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해군역사보존협회가 발표한 '일본 해군의 역사'에 야마토 초대 함장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2대 함장은 [[https://ja.wikipedia.org/wiki/%E9%AB%98%E6%9F%B3%E5%84%80%E5%85%AB|다카야나기 노리하치(高柳儀八)]]로 1941년 11월 1일부터 야마토 함장이 되었다.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이 야마토 취역 시에 함장이었기에 야마토 초대 함장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3대 함장은 [[https://ja.wikipedia.org/wiki/%E6%9D%BE%E7%94%B0%E5%8D%83%E7%A7%8B|마쓰다 치아키(松田千秋)]]로, 1942년 12월 17일부터 함장 자리에 있었다. 그는 야마토 함장이 되기 전인 1940년에 [[총력전 연구소]]라는 곳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패배한다는 예측을 한 그곳이다. 야마토 함장을 지낸 후인 1944년 5월 1일에는 4항전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세급 전함]]에 타고 [[레이테 만 해전]]에도 참전했으며 북호작전의 성공을 이끌기도 했다. 야마토 함장 중에서는 상당히 승진한 인물이라 그런지 영문위키에도 등재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aki_Matsuda|영문위키 마쓰다 치아키]] 참조. 4대 함장은 [[https://ja.wikipedia.org/wiki/%E5%A4%A7%E9%87%8E%E7%AB%B9%E4%BA%8C|오노 다케지(大野竹二)]]이며, 1943년 9월 7일부터 함장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1943년 12월 25일에 야마토가 미 해군 발라오급 잠수함 스케이트의 어뢰 1발에 명중당하고 3000톤의 물을 먹었을 때의 함장이 이 자다. 5대 함장은 [[https://ja.wikipedia.org/wiki/%E6%A3%AE%E4%B8%8B%E4%BF%A1%E8%A1%9B|모리시타 노부에(森下信衛)]]로, 그는 1944년 1월 25일부터 11월 24일까지 함장직을 역임했다. 이 기간은 야마토 함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기간이기도 한데,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함재기들을 [[팀킬]]하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패배하고 줄행랑쳐서 작전을 말아먹은 게 바로 이때다. 구리다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구리다 턴을 시전한 후 암살 위협까지 받은 점을 생각하면, 패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모리시모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는 야마토 함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2함대 참모직을 받았으며, 야마토가 오키나와로 자살돌격을 했을 때에도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었다. 그는 야마토가 침몰할 때까지 배에 머물렀지만, 야마토가 폭발과 함께 침몰할 때 배 밖으로 튕겨나가서 살아남았다. 1960년에 사망. 6대 함장이 바로 야마토 최후의 함장을 지낸 아루가 코사쿠(有賀 幸作)다. 야마토 함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 사람을 가리키며, 유명세 덕분에 야마토 함장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https://en.wikipedia.org/wiki/K%C5%8Dsaku_Aruga|영문위키 아루가 코사쿠]], [[https://ja.wikipedia.org/wiki/%E6%9C%89%E8%B3%80%E5%B9%B8%E4%BD%9C|일본어 위키 아루가 코사쿠]] 문서가 따로 있다. 1941년 6월부터 아루가 코사쿠는 제4구축대 사령관을 맡았으며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해서 전쟁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을 만들어낸 전설의 구축함 [[아라시(구축함)|아라시]]가 바로 이 부대 소속이었고, 아루가 코사쿠는 사령관 자격으로 아라시에 타고 있었다. 그 외에도 미드웨이 해전 당시 코사쿠는 미드웨이해전 당시 [[아카기(항공모함)|아카기]]의 승무원을 구조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 때 아카기 함장인 아오키 타이지로(靑木 秦二郞)가 자신은 함선과 함께 침몰해서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코사쿠가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뜯어말려서 끝내 구조했다. 정작 이후에 코사쿠는 야마토에서 탈출을 거부하며[* 다만 야마토가 대폭발을 일으킨 이후 침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인이 탈출을 거부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승조원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보려고 상황 통제를 해보려다 못 빠져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최후를 맞이했고, 타이지로는 살아서 돌아왔다는 황당한 이유로 왕따를 당하며 항공대 대장 직을 전전하다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포로 생활을 한 뒤 귀국해서 더 심한 왕따를 당했다. 다만 그가 아라시에 좌승했으므로, 아라시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에 책임을 져야 할 자임은 분명하다. 6월 4일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후, 아라시에 포로로 잡힌 웨즐리 프랭크 오스무스(Wesley Frank Osmus) 소위는 6월 5일에 도끼로 뒷목을 가격당한 후 바다로 떨어졌으며,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아라시 승조원들에 의해 바다로 밀쳐져서 수장당했다. [[https://ja.wikipedia.org/wiki/%E5%B5%90_(%E9%A7%86%E9%80%90%E8%89%A6)|일본어 위키 아라시]] 문서(2021년 6월 20일자)에서는 아라시의 승조원들이 이 전쟁범죄의 책임자로 아루가 코사쿠 사령관, 와타나베 함장, 마츠우라 츠토무(松浦勉) 포술장을 지목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전쟁 중에 죽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김으로서 처벌을 피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으나, 부하들의 잘못은 상관의 책임이며 아루가 코사쿠는 그날 아라시에 탔던 사람들 중 최고 지휘관이었다. 전쟁 후에 미군이 이 문제로 조사를 했지만 용의자가 모두 죽었다는 이유로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아루가 코사쿠가 전쟁범죄자로서 웨즐리 프랭크 오스무스 소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루가 코사쿠는 1943년 3월에 중순양함 [[초카이(중순양함)|초카이]] 함장을 맡았고, 말라리아로 병석에 누웠다가 1944년 6월부터 11월까지 어뢰학교에서 교사가 되었다가, 1944년 11월 25일에 전함 야마토의 함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5년 4월 7일, 야마토는 오키나와 특공작전 도중에 미군의 공습을 침몰했다. 아루가 코사쿠는 배와 운명을 함께 했으며, 전사했을 때에는 대좌였지만 사후에 2계급 특진되어 제독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대체적으로 아루가 코사쿠에 대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 실린 '전함 야마토의 최후'에서도 "아루가 코사쿠 함장은 최선을 다했다. 도쿄의 높으신 분들은 아루가 코사쿠 함장이 과연 세계 최대의 전함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지 의심했는데, 그들에게 아루가 코사쿠 함장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고 나오는데, 다수의 어뢰를 피하는 등 상당한 조함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야마토는 침몰했지만, 워낙 불리한 상황이었으니 아루가 코사쿠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어차피 그 상황에서는 누가 몰아도 침몰을 피할 수 없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우수한 함장으로 보이지만, 위에 언급된 전쟁범죄가 발목을 잡는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